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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1 20:35

<뻬쩨르부르그 이야기> 고골 도서관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하나의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독특한 독서경험을 안겨준다. 요즘 소설들에서는 보기 힘든 글쓰기 방식이다. <죄와벌>은 영화 세트장같은 전체적인 구도와 소품을 세세하게 그려 보인다. 그리고 그 세트장을 배경으로 라스꼴리니코프는 연기를 하듯 걸어다닌다. 전당포 노파로부터 가져온 지갑과 귀중품들을 버리기 위해 허름한 외투 차림으로 그가 돌아다녔던 뻬쩨르부르크의 광장이나 거리가 고골의 <뻬쩨르부르그 이야기>에 다시 등장한다.

소설은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발달한 문학 형식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인쇄술 발달로 책의 저렴한 대량 보급이 가능해지면서 시간을 내어 극장을 찾는 대신에 책을 통해 이야기를 접하는 것은 귀족적 사교생활과 거리가 먼 계층들에겐 매우 편리한 방식이었다고 한다. 요즘은 영상 매체 드라마에 빠져들지만 200년 전에 스토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활자의 상상력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의 장편들이 마치 거대 장편영화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죄와 벌>을 읽었던 기분 좋은 기억으로 뻬쩨르부르크가 책 제목인, 이름만 들어봤을 뿐인 고골의 단편집을 골랐던 것인데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릴 때 <바보 이반>을 비롯해 러시아 전래동화를 읽은 적이 있는데, 러시아의 민화들엔 보기 흉한 요정이나 악마가 등장했다. 고골이 우크라이나의 민화를 배경으로 썼을 <지깐까 근처 마을의 야화>에도 등장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러시아의 대표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라는 편견이 생겨서인지 러시아의 대표 소설도 대부분 사실주의 경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고골의 단편집은 판타지처럼 코가 귀족 행세를 하고(코), 유령이 돌아다니고(외투) 개가 말을 하고 편지를 쓴다(광인일기). 매우 사실주의적인 뻬쩨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환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고골은 19세기 전반부를 살았던 소설가임에도 그의 단편 하나하나는 고루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이 환상적인 이야기들은 먼 판타지 세계를 향한 것이 아니다. 관료화된 당시 러시아의 사회의 현실을 향하고 있으며 귀족이나 공직자들의 이중성을 변사의 어투로 신랄하게 풍자한다. 현실성이 없는 판타지에서 발휘되는 날카로운 현실 풍자라는 측면에서 배울 점이 많다.


2017/06/30 16:04

<거짓말이다> 김탁환 도서관에서


이 책을 펼치지 말 걸....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후회가 밀려왔다. 누군가는 80년 광주에 대한 기억을 담은 한강의 <소년이 온다>조차도 마음이 아파서 펼치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긴 기다림 끝에 세월호는 인양되었고 이제 명확히 할 일들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마음으로 여러 번 애도를 했고 3년상을 치렀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 탈상을 했으니 이젠 책을 읽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만큼 충분히 울었고 더이상 흐를 눈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참 힘들었다.

80년 5월의 광주는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기까지 몇 년이 걸렸는지 모른다. 아직도 북한의 소행이었다는 유언비어가 남아 있는 정도이니. 나 역시 몇 년이 지난 뒤에야 그 참혹했던 사실을 접했다. 나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광주의 학살극으로부터 뒤늦게 충격을 받았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상대로한 권력자의 조직적인 살상극의 기억이 많은 사람들을 움직였고 피를 먹고 자라나듯 민주주의가 서서히 오랜 세월을 두고 자라났다. 세월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살상극이었다. 그 충격과 슬픔이 전국적으로 동시에 들이닥쳤다. 일상은 깨어졌다. 그러나 이런 유비쿼터스의 시대에서도 거짓말은 난무했다. 이 책의 제목이 <거짓말이다>인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책엔 몰랐던 내용이 많았다. 진상규명이 늦어지면서 이런저런 혐오를 퍼뜨리는 유언비어나 비난까지도 늘어났고 그런 혐오스러운 모습을 보거나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 점점 내 안의 무관심의 영역도 넓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민간 잠수사들이 사건 직후 했던 역할들에 대해서는 모르는 부분이 태반이었다. 이 책을 통해 잘못 알려졌던 것들, 민간 잠수사들이 겪었던 고통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땐 이 가슴 아픈 책을 왜 이렇게 빨리 쓴 건지 작가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지금 보니 빠른 것이 아니라 참 적절하게 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세월호의 아픔이 치유되기까지 얼마나 걸릴 지 모르겠다. 세월호에서 별이 된 아이들과 비슷한 연배의 자녀를 두었거나 앞으로 그렇게 될 자녀를 키우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이거나 그리고 이미 아이들을 키워봤던, 한마디로 부모여서 세월호의 아픔은 남다르다. 부모의 이름을 달고 있는 한 그 아픔이 치유될 수 있을까. 내 아이는 전혀 애틋하지 않은 현실인데도 세월호는 이렇게 나를 붙잡는다.

끝으로 이 소설의 탄생에 주인공이 되었던 고 김관홍 잠수사의 명복을 빈다.

2017/06/24 10:35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도서관에서


책의 제목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온 도시를 휩쓴 전염병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까뮈의 <페스트>와 함께 자주 언급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얼마전 <페스트>를 읽은 김에 이 책을 집어들었다. 하지만 두 작품은 전염병 앞에 처한 인간의 처지를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랐다. 갑자기 실명하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활동이 중단되어버리는 처지로 그려졌다. 길에서 눈이 멀면 당장 집에 돌아갈 수조차 없고 화장실을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름이 없다. 대신에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 차를 훔친 남자, 처음으로 눈이 먼 남자의 아내, 안과 의사, 검은 색안경을 낀 여자, 검은 안대를 한 노인, 눈물을 핥아주는 개로 호명된다.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는 목소리만으로 구별될 뿐 이름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수잔, 마테오 이런 추상적인 이름보다 행동이나 특징으로 호명된 덕분에 등장인물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확실히 그려지고 헷갈리지 않았다. 

막막하게 눈이 먼 상황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페스트>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극한의 지옥도이다. 눈이 멀어 수용소에 격리된 뒤엔 범죄자 취급을 당하게 되고, 수용소 내부에서는 사람들끼리 식량을 두고 다투거나 의심하고, 약육강식의 논리가 자라나 총을 가진 깡패들의 금품 약탈에다 집단적인 성폭행이 벌어지기도 한다. 눈이 먼 상태는 인간이 무기력하게 정글 속으로 던져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작가는 질서도 없고 약육강식의 논리만 남아 있는 곳에서 인간에게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끔찍한 상태를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그래도 수용소 안에서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의사의 아내와 몇몇 눈이 먼 사람들은 깡패집단의 폭력과 비인간에 맞선다. <페스트>의 의사 리유나 타루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수용소에 같이 갇혀 있고 눈도 보이지 않으면 돈이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눈먼 깡패 집단이 식량을 독점하고 돈을 갈취하는 것이 황당했다. 그들은 식량배급을 무기로 여자들을 요구하는 비인간적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한다. 눈먼 사람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희생양된 여자들이 잔학한 깡패에 저항하는 중심이 된다. 그리고 그 방식은 살인과 방화를 통해서인데 이것을 또다른 범죄행위로 치부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의사의 아내가 깡패 두목을 죽인 것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깡패들에게 가진 것을 약탈당하고 성폭행을 당하는데 이를 참고 견디는 것이야말로 비굴한 일이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던 라이터로 깡패들의 방에 불을 지른 한 여자의 행위는 의사의 아내에게 감동하였던 데서 나온 자기희생적인 저항일 것이다.

두 눈이 보이지 않는것은 노동력 손실에 있어서도 최상급에 속할 정도로 치명적이다. 도시의 전체가 눈이 멀어버린다는 작가의 설정은 중요한 것이 결핍되면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라는 문제제기란 생각이 든다. 읽는 내내 작가가 곳곳에서 생각할 거리를 내놓는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수용소에서 벌어진 일은 인간이 야만적인 처지에 빠지면 인간성 역시 야만적이게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공권력의 무책임한 모습, 극악무도한 깡패들의 야만성, 여성들의 비참한 처지, 식량의 배분을 둘러싼 심리들, 인간의 생리적 본성, 사람들 사이의 연대 등등 불현듯 지나간 것만 여럿이다.

서로 의지하는 동료 사이가 된 의사의 아내를 비롯한 몇명은 군인들이 사라지는 바람에 수용소를 탈출했지만 수용소 밖의 사정은 수용소 안과 다를 바 없다. 수용소 밖 사람들 역시 완전히 눈이 멀어 여기저기 살 곳을 찾아다니고 식료품을 뒤지며 살고 거리에는 쓰레기와 배설물, 그리고 시체가 나뒹구는 상황이다. 음식을 찾는 일도 계속되어야만 한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의사의 아내가 했던 역할은 희생적이다. 그녀는 눈먼 사람들을 이끌어 의사의 집으로 인도했고 먹을 것을 구해와 굶주림을 달랬다. 비가 오는 날 여자들과 함께 몸을 씻고 새옷으로 갈아 것은 수용소에서 그녀가 사람을 죽였던 일에 대한 일종의 정화의식이자 사람으로서의 품위의 회복이라고 여겨졌다.

의사의 아내는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덕에 정확히 상황 판단을 하고 사람들을 이끌어 갈 수 있었던 인물이다. 절망적인 상황 하에서 나올 수 있는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눈이 먼 사람들과 달리 도저히 맨 눈으로 보기 어려운 역겹고 끔찍한 상황들까지도 봐야 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의사의 아내는 죽은 시체들이 나뒹굴거나 짐승들이 시체를 뜯어먹는 광경을 봐야 했다. 눈먼 사람들에게 적어도 그런 광경들은 보이지 않는다. 눈먼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하의 식품창고를 찾아냈던 의사의 아내는 그녀의 흔적을 좇아 창고로 내려왔던 사람들이 지하에 떨어지거나 갇힌 채 죽은 시체가 되어 산더미를 이룬 사실을 알고 몹시 자책한다. 의사의 아내는 점차 절망하며 자신도 눈이 멀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눈을 가려놓은 성당의 성상들을 본 의사 아내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잘 와닿지는 않았는데 그녀의 절망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신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고 반대로 신성모독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의사 아내의 좌절감이 커지는 순간 악몽에서 깨어나듯이 하나둘 눈먼 사람들은 앞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이게 된 상황에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살 수 있을까.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의사의 아내의 이 말은 눈이 멀었을 때 닥쳐왔던 모든 야만과 불행이 사실은 눈뜬 상태에서 벌어지는 것이라는 은유로 들린다. 처음 작가의 문제제기는 중요한 것을 상실했을 때의 절망과 야망을 상상해보라는 것 같았는데, 책을 거의 다 읽어가면서 눈을 뜨고 있어도 우리 내부에는 야만과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문제제기로 바꿔 들린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할 것만 같다.



2017/06/19 13:34

<스토너> 존 윌리엄스 도서관에서

가끔 부모님 집을 방문하면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가 너무 커서 귀가 먹먹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연로하신 아버지의 청력이 심하게 나쁘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마련해둔 보청기는 익숙하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눈앞에서 인사를 하기 전까지는 누가 왔는지도 모르신다. 등을 돌린 채 텔레비전을 향해 꾸부정하게 앉아 있는 뒷모습을 볼 때마다 사람을 난청의 침묵 속에 밀어넣어 고독하게 만드는 노화의 짖궂음을 생각한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과 교류할 수 없는 마음의 아픔과 회한을 난청의 벽 속에서 조용히 인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고독과 인내의 모습이 어쩐지 스토너와 닮았다.

이야기는 특별히 성공적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대학교수 스토너의 죽음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야기의 시계는 그의 출생 시점으로 다시 돌아가 특별한 것 하나 없는 이 스토너라는 사람의 일생을 하나하나 짚어나간다. 스토너가 성장하여 영문학도가 된 후 결혼하고 종신교수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의외로 평범하다.

스토너라는 인물은 천성이 선량하고 인내심이 있으며 성실하다. 실력 없는 대학원생 워커를 타협하지 않고 낙제시키고 그를 후원하는 지도교수인 로맥스와 평생을 대립하게 된 것도 그의 학문적 성실함과 무관치 않다. 선량한 천성 덕분에 그의 인생이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고 두 사람은 서로의 대화를 단절하는 것, 즉 소통을 하지 않는 것으로 관계를 이어나가게 된 것 같다. 이런 단절이라면 사람 사이에서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리 큰 문제도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스토너에게 있어서 문제는 가까운 사람들과 소통이 잘 되지 않았고 그것이 그의 고독감의 본질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야기 내내 주변의 인물들과 소통이 잘 되지 않는 스토너가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농부가 될 것을 기대하며 대학에 보낸 부모님에게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꾸게 된 것을 알리거나 상의하지 않았다. 그의 전공 선택에 영향을 미친 영문학 교수였던 아처 슬론에게 그가 느꼈던 교감이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사귄 몇 안 되는 친구들과의 교류는 금요일 저녁 기계적으로 만나 맥주를 마시는 일이었으며 인류를 위해 1차 대전에 뛰어들었던 친구들과 달리 그가 입대하지 않은 이유 역시 분명하지 않았다. 그의 행동이나 의사결정은 그냥 그럴려니 하는 양해의 수준이었던 것 같다. 소통의 부재는 스토너와 이디스의 관계에서 분명해진다. 처음 만난 이디스에게 사랑을 키우고 청혼을 하는 스토너와 유럽여행을 포기하고 부모님의 허락으로 결혼을 받아들이는 이디스는 마치 벽에 갇힌 상대방을 대하는 형국이다. 결혼 후 후회와 좌절감을 스토너에게 표출하는 이디스의 모습은 결혼을 통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사람의 뒤늦은 히스테리로 비쳐졌다. 두 사람은 육체와 정서가 완전히 분리되고 단지 아기를 갖기 위한 행동만으로 남은 일그러진 사랑을 보여준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으며 안정적인 종신교수의 자리를 얻었지만 스토너의 인생이 불안정하고 고독하게 느껴졌다.

스토너가 인생에서 평범한 일상을 깼던 시기는 바로 젊은 여강사 캐서린과 사랑에 빠진 때이다. 하루종일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대화를 하며 그는 그동안 타인에게 친밀감이나 인간적인 따스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가 자신에 관해 인생에서 처음으로 깨달은 사실일 것이다. 캐서린은 그에게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사랑에 빠져보아야 한다고 말해준다. 학과장의 권력을 쥔 로맥스의 계략에 의해  캐서린을 떠나보내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강의에 매진하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나이에 비해 늙어버린 몸뚱이이다.

그의 나머지 인생이 그런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이 인생에 대해 무엇을 기대했는지 묻는다. 그는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을 원했고,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고 사랑을 원했고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음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실패로 끝났다고 인정했다. 뒤늦은 회환을 밀어놓고 관조의 자세로 눈을 감는 그의 모습에서 평온을 느낀다.

이 소설은 1965년 발표 후 거의 잊혀졌다가 50년이 다 되어 다시 주목을 받아 유럽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반세기의 세월을 건너뛰어 많은 독자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었던 저력이 어디에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최근에 씌여진 것 같은 낡지 않은 표현이나 언어구사도 인상적이었지만 다른 어느 때보다도 사람들과의 소통이 흔해진 요즈음 여전히 소통의 결핍으로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소통의 부재를 고독과 인내로 성실히 견뎌낸 스토너가 던진 인생의 울림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공감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7/06/16 16:58

<페스트> 알베르 카뮈 도서관에서


이 책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니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도 함께 뜬다. <페스트>가 그 1001권에 포함된 것은 재앙 혹은 부조리한 상황에 놓이게 된 인간과 사회에 대한 탁월한 성찰 때문일 것이다. 1001권이 좀 많으니 그 중에 200권을 추려낸다면 <페스트>도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작가는 페스트에 의해 폐쇄된 오랑의 삶을 징역살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현대적이고 평범한 한 도시의 일상이 깨어지는 과정은 의외로 무덤덤하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실감하지 못하고 도시의 폐쇄로 인한 귀양살이를 내재화하여 체념하거나 좌절한다. 일부 폐쇄된 시의 문 앞에서 폭동을 일으키기도 하는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처음엔 현실을 실감하지 못하지만 부조리한 상황임을 깨닫게 되자 저항도 하고 부정을 하기도 하지만 체념하거나 무관심해지며 급기야 부조리의 질서를 내재화하기도 하는 심리극 같다. 페스트가 그려낸 이런 상황이 한국의 식민지 시대나 전쟁 상황과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 카뮈가 이 소설을 구상하던 시기는 2차 세계대전 기간이었다.

소설은 전염병이 전개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된다. '서술자(나중에 서술자는 자신이 의사인 리유임을 밝힌다)'가 기록하는 연대기의 형식이다. 그래서 이야기가 박진감과는 거리가 멀다. 만일 영화로 만든다면 제작자는 인물에 대한 묘사는 간단하게 처리하고 재난 영화 특유의 긴장감과 박진감으로 채워넣을 것 같다.

이 소설의 가치는 서술자가 타루의 수첩의 내용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부류의 인간 유형을 그려내 우리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게 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여러 부류가 등장하는데, 첫째, 체념형으로서 파늘루 신부가 여기에 해당한다. 파늘루 신부는 재앙이 신의 뜻임을 설교하지만 아무 죄도 없는 어린아이가 페스트로 희생되는 현실에서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신부는 종교적 신념을 굳건히 지키고 치료를 거부한 채 페스트로 죽음을 맞는다. 둘째, 도피형으로서 신문기자 랑베르가 있으며, 셋째, 기회주의 부류로 코타르는 페스트가 장악한 도시에서 밀수와 암거래 등을 통해 부를 쌓는다. 일제 시대의 친일파 생각이 난다. 넷째, 서술자가 가장 가치를 부여하는 소시민 그랑은  영웅적 부류이다. 보건대에 자원하여 질병의 통계를 책임지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하는 반면에 지어낸 문장을 이리저리 고쳐가며 옛날에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기도 하는 이 사람을 서술자는 진정한 영웅이라고 가치를 부여한다. 진정한 영웅은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라 인물의 영웅적 행위를 지칭한다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의 인물형은 저항형의 부류로서 이 소설의 중심인물이기도 한 의사 리유와 타루이다. 리유와 타루는 보건대를 조직해서 조직적으로 병에 대항하면서도 둘 만의 우정을 쌓아나간다. 의사 리유와 타루, 두 인물은 죽음에 저항하면서 인간애라는 가치를 가장 빛내주었다.

리유는 쉽사리 감정에 휩싸이거나 열정에 들뜨거나 하지 않고 묵묵히 환자를 돌본다. 그의 진정한 용기는 '끝없는 패배'임을 알면서도 페스트에 맞서 싸우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리유는 직업상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이것은 그의 무신론적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싸움을 멈추어야 할 이유는 못'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무엇보다 리유는 다양한 인간부류들에 대해 존중한다. 그는 파늘루 신부의 신념에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신부가 페스트로 죽자, 병명 미상이라고 적어줌으로써 신부의 종교적 신념을 존중해주었으며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랑베르의 행복을 존중해주었다. 지금도 전쟁, 이념 투쟁, 테러가 곳곳에서 끊어지지 않는 무차별하게 혹은 호시탐탐 부조리한 상황이다. 결코 페스트 환자가 되고 싶지 않지만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게 마련인 가운데 리유가 보여준 관용과 존중의 미덕이 빛난다. 이 점은 내가 소설에 마음이 가장 끌린 이유이기도 했다.

리유의 벗이 된 타루는 진실에 눈을 뜬 젊은 청년을 떠올리게 한다. 눈앞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지는 재판을 바라보며 부조리를 깨달으며 성장한 그는 페스트에 저항하는 의사 리유와 출발점이 같다.  나는 성인들보다는 패배자들에게 더 연대 의식을 느낍니다. 아마 나는 영웅주의라든가 성자 같은 것에는 취미가 없는 것 같아요.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그저 인간이 되겠다는 것입니다.”(리유그럼요, 우리는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어요. 다만 내가 야심이 덜할 뿐이죠.”(타루) 그렇게 두 사람은 우정을 쌓아 나간다. 이 소설에서 클라이막스를 뽑으라고 한다면 그가 리유와 함께 바닷가에서 함께 수영을 하는 장면을 뽑겠다. 나란히 물살을 헤치며 수영하는 장면은 두 사람의 정신적 교감과 우정의 상징이다. 소중한 것들이 영원히 함께 가지 못한다는 것은 비극적이다. 페스트가 잦아드는 가운데 리유는 타루를 페스트로 잃는다. 요양원에 있던 아내 마저도 죽었다는 소식이 전달된다. 이 소설이 간절하게 다가든 것은 희망 속에 가시를 돋운 비애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페스트가 끝났다는 선언과 함께 도시는 축제 분위기가 된다. 기쁨과 환희 이면에 희생에 대한 비애감이 있기에 그저 기뻐할 수가 없다. 타루와 아내를 잃은 리유를 비롯해서 사랑하는 가족의 부재를 실감하는 가족들이 존재한다. 리유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인간들은 늘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힘이고 순진함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리유는 모든 슬픔을 넘어서 자신이 그들과 통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라고.  일제 항복 직후 어리벙벙했던 해방의 기쁨도 잠시 친일파가 되돌아오고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격화되었던 식민지 시대를 떠올려본다. '페스트의 시대가 끝난 그때에도 여전히 페스트를 기준으로 삼아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2017/05/30 09:18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서중석 답하다 도서관에서

요새 역사책을 읽게 된 것이 꽤 오랜만이다. 언제 역사책을 읽었었나 생각해보면 대부분 학교에 다닐 적이다. 교과서로든 교양서로든 역사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학생 때였다는 것은 역사와 교육의 밀접함을 웅변한다하겠다. 하지만 역사 분야만큼 논쟁이나 입장의 차이가 큰 분야는 없는 것 같다. 특히 한국 현대사가 그렇다. 그래서 교과서가 중요하다.

이 책은 인터뷰 형식의 역사 이야기이다. 1권은 해방과 분단, 친일파에 할당하고 있다. 프레시안에 연재되었다고도 하며, 교학사 교과서가 나올 때쯤이어서 이와 관련된 언급도 간간이 눈에 띈다.

분단과 관련된 부분은 사실적이고 균형적인 시각이 돋보였고 당시 사람들의 여론이나 분위기가 잘 전달되어 생생했다. 친일파 청산 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명확했다. 뉴라이트의 시각에 대한 조목조목한 비판이 설득력이 있었다. 읽는 사람과 많은 공감을 이끌어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일례로, 박정희가 한국의 경제를 일으켜세웠다고 하는 신화에 대해 특정인이 했다고 보기 어려운 근거가 조목조목 잘 나와 있었다.

전체 6권으로 이루어진 대작인데 술술 읽히므로 부담스럽지는 않을 것 같다.

2017/05/29 18:56

<현대사 인물들의 재구성> 고지훈,고경일 도서관에서


인물 위주로 역사를 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 하지만 인물에 얽힌 일화가 들어있으면 읽는 재미는 늘어날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은 만화 같은 캐리커처와 사진자료를 넣어 흥미적 요소를 많이 가미하였다. 꽤 두껍지만 읽다보면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되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궁금한 현대사 인물이 들어 있어서 읽게 되었는데 주요 인물들을 범주에 따라 분류해서 비교하거나 대비시켜 놓은 점이 인상적이었다.

특정한 인물이 역사의 물길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주요 역사의 흐름에 함께 하거나 희생당하거나 흐름을 악용하다가 결국은 심판을 받는다. 역사의 흐름은 개개인의 바램이나 주관과는 독립적으로 도도히 흐르는 저 강물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폭포에 끊기고 보에 막히더라도 강물은 어디로 흘러가야 할지 안다. 강물의 흐름을 아는 자는 강물과 교감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2017/05/29 07:13

<미학 오디세이> 진중권 도서관에서


매우 독특한 구성과 스타일의 책이다. 교과서적으로 다시 책 제목과 목차를 구성하면 <미술을 통해 본 미학의 역사>가 책제목이 될 것이고 대략적인 목차는 /원시 예술과 미술의 탄생 /고대예술과 미를 바라보는 관점의 분화 /중세 예술에서 중심이 된 미의 관점 /근대 예술과 학문으로서 미학의 성립 /미학의 두 가지 흐름 정도로 될 것같다. 이 책은 미학 이론을 교과서적으로가 아니라 톡톡 튀는 소제목을 단 이야기 위주로 풀어나가 재미를 높였다. 그리고 중간에 에셔의 신기한 석판화 그림을 끼워넣어 흥미를 높였다. 한 때 오리인지 토끼인지, 3차원 공간을 왜곡하는 이상한 그림이 유행했었는데 그게 벌써 이 책이 나왔던 20년 전이었구나 싶다.


교과서에 익숙한 사람으로서는 읽고나서 미학에 대한 느낌이나 감은 생길 것 같은데 내용적으로 정리되기가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고 미학 전문서를 읽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우므로 이 책을 통해서나마 정리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핵심 내용을 추출해서 요약하면서 읽었다. 


인간의 역사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적 사고 방식의 대립과 교차한다. 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상하게도 인간의 사고방식은 어디서나 유사한 대립구조인 것 같다.


 요약한 것 중 일부를 말하자면: 미학이라는 분야는 독일 철학자 비움가르텐에 의해 정립. 인간의 감성을 일종의 이성(이성의 대상?)으로 봄으로써 그동안 정신을 현혹하고 진리를 왜곡한다고 매도되어왔던 감성을 복권시킨 것임. 미학은 데카르트 정신에서 탄생한 것임. 미와 예술은 감성의 일이지만, 이 감성 자체가 일종의 불완전한 이성, 유사 이성으로 본 결과 일종의 감성적 인식이 된다. 학문적으로 이를 연구한 것이 미학으로서 감성적 인식의 학문이다. --> 진리미학의 전통이 되어 헤겔에서 완성됨.


<--> (형식미학)예술의 본질은 진리가 아니라 형식에 있다. 예술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상상력의 유희이며, 영감에 따라 자유로이 창작을 한다. 칸트. 낭만주의 미학




2017/05/14 22:36

<한국현대사 산책> 1940년대 1편-강준만 도서관에서


역사책을 읽은 지 오래되었다. 요즘 해방전후사를 읽을 필요가 생겼다. 이야기책을 읽듯 부담없이 읽고 있다. 다양한 관점의 책을 읽어볼 요량이다.

2017/05/14 22:31

<인간적이다> 성석제 도서관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늘어진 젖살과 불룩한 배를 내놓은 중년 아저씨의 그림이 표지에 그려져 있다. 책 제목이 <인간적이다>여서인가. 이런 모습이 인간적이라고 웅변이라도 하는 듯하다.

두세 쪽에 불과한 아주 짧은 소설들을 모아놓았다. 소설이지만 소설이 아닌 듯 실제 전해들은 이야기를 마치 전설을 들려주듯 풀어놓은 글들이 많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냥 풀어놓은 이야기들. 인간적이다.

다양한 글을 읽고 싶어서 눈에 뜨여서 이 책을 빌려왔는데, 역시 내 취향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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