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포토로그


2018/08/06 21:11

<내 머릿속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김대식 도서관에서


뇌 과학자가 인간과 사회에 관하여 쓴 이야기이다.

뇌의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보면 무척 달리 보인다. 내가 불러내는 기억은 뇌 속에 압축되고 변형되고 분산되거나 망각된 것의 일부가 나온 것이다. 뇌는 세계를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감각기관을 통해 자신의 경험과 믿음을 정당화하는 해석된 결과를 보여준다. 그래서 뇌는 거짓말장이이고 보고싶은 것만 본다고 한다. 뇌를 통해 본 세계가 진짜 실재하는 객관인가의 근본적인 의문이 생긴다. 또한 좋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인간의 본성이 결국 두뇌의 작용이라면 인간의 정신적인 성숙이라는 것은 애당초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 싶다. 이 글에 의하면 뇌는 4천원짜리 커피가 2천원짜리 커피보다 맛있다고 하고 팔이 안으로 굽으며 편가르기를 한다. 저자는 뇌가 yes라고 명령할지라도 No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마저도 자유의지라는 착각을 갖도록 진화된 것일지 모른다. 

두부 덩어리 같은 두뇌는 100조 개가 넘는 시냅스의 결집체이고 이 속에 모든 기억과 감정이 처리되고 저장된다. 언제나 신기하면서도 알 수 없는 의문 덩어리여서 그냥 모른 체 하는 게 편했다. 그런데 뇌가 망가지면 의식마저도 망가진다. 뇌는 말짱한데 의식만 망가지는 경우가 있는 건지 모르지만 뇌가 망가지면(특히 전두엽) 의식이 망가지는 것은 명확하다. 알츠하이머가 그렇고 많은 정신질환도 그렇다. 두뇌를 모른척 하기에는 노화와 질병이 가깝다.

두뇌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본성도 달라지는 것 같다. 그에 따라 바라보는 사회도 다르게 보인다. 독재나 민주주의, 민족주의, 자본주의가 보인다. 두뇌는 얼굴을 잘 기억하는 부위를 갖고 있으며, 인물을 숭배한다. 팔이 안으로 굽듯 민족주의를 숭배하며 앵커링 효과에 따라 상품이 소비된다. 참도 거짓도 없는 것 같은 사회가 되어버린다. 이를 극복하는 자유의지는 정말로 없거나 착각인 것일까.

원래 인간이 그러함을 수용하려는 이해심도 생겨나지만 추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2018/07/05 14:15

<시골의사> 카프카 도서관에서


사람은 여러가지 이유로 선택의 기로에 선다. 대부분의 선택은 하나를 고르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거나 순서대로 선택하는 경우는 차라리 덜 곤혹스럽다. 한겨울 시골의사는 말을 내어준 사내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그의 손아귀에 하녀를 맡긴 채 마차를 타고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러 가는 상황에 처한다. 호의를 받아들일 경우 하녀는 시골의사가 없는 동안 무뢰한 같은 이 사내에게 무참히 짓밟히게 될 것이다. 시골의사의 선택은 하나를 고르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선택이다. 환자를 살리느냐 하녀를 살리느냐. 기괴하고 비현실적인 마법에라고 걸린 듯 시골의사는 순식간에 환자의 방문앞에 떠밀리듯 당도한다.

창문에 머리를 디민 두 마리의 말이 감시라도 하듯 방안을 들여다보는 가운데 어린 환자의 환부를 들어야 보아야 하는 시골의사에게서 수치스러움의 감정이 느껴진다. 죽어가는 잠자리만 좁힌다고 속삭이는 환자의 말은 의사에게 치욕감과 무기력으로 다가온다. 시골의사의 구원은 어디로부터 가능한가? 그는 털외투도 걸치지 못한 채 천상의 말들이 끄는 지상의 마차를 타고 탈주하며 속았다고 절규한다.

기괴하고 비현실적인 서술로 제기하는 구원의 문제이다.



2018/03/07 23:35

<북유럽 신화> 닐 게이먼 도서관에서


- 작가가 <코렐라인>을 쓴 사람이다. <코렐라인>은 사춘기 딸이 단추눈이 달린 가짜 엄마 아빠가 사는 환상의 세계에 들어갔다가 탈출함으로써 엄마 아빠에 대한 사랑을 확인한다는 이야기로 같은 제목의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지기도 한 판타지 동화이다. 판타지를 좋아하는 작가의 배경과 북유럽 신화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 <북유럽 신화>는 신화라기보다는 난롯가에서 읽는 옛날 이야기 같은 느낌이다.  오딘이나 토르, 이름만 들으면 무척 신비롭기는 한데 이들은 친근하고 수다스러운 이웃같다. 모여서 먹고 떠들고 허풍을 치기도 하고 어떤 일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의견을 말하기도 한다. 신이라기 보다는 마을 사람들이 북유럽의 긴 겨울날 옹기종기 이웃들이 모여 웃고 떠드는 것에 가깝다고나 할까. 북유럽에서는 신과 인간의 거리가 무척 가까웠던 것 같다. 신들은 사람 같고 신들이 창조해낸 사람도 신처럼 신통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2018/03/07 19:49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도서관에서


알츠하이머성 치매에 걸린 은퇴한 연쇄살인범을 다룬 장편. 
기억이 끊기는 것을 암시하듯 뚝뚝 끊어지는 단락들이 인상적이었다. 예리한 경구들은 광고카피같기도 하고 시의 한 구절같기도 했다.

악당도 정의로울 수 있는가? 범죄자로부터 딸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전직 연쇄살인범을 보면서 아버지의 자세와 의로움을 느낀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으로 처음 살인에 발을 디딘 것조차 정당한 근거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죽였던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된다. 하지만 마지막의 반전은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작가는 후기에서 작품의 진도가 나가지 않아서 참 힘들었다고 했다.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재미있게 잘 읽었다.


2018/03/07 19:33

<오직 두 사람> 김영하 도서관에서


요새 책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무척 어려워졌다.
최소한의 기록의 의미로 간략한 메모만 남겨두어야 겠다.

- 전자책으로 읽은 책이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한 저자의 이력이 특이했고 관심이 갔다. 어디에선가 작가가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번역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친 것을 읽은 기억이 난다. 아마 자신의 번역이 매우 불만스러웠던 것 같았다. 번역의 본질에 대해 많은 생각이 있을 것 같은데, 언젠가 작가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다.

- 김영하 작가 특유의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문체 덕분에 책을 읽는 내내 입꼬리가 올라간다. 단편집의 글 대부분이 그랬다. 진지하고 심각한 삶의 태도와 비추어 보면 한 단계 진일보한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괴롭고 고통스러운 동일한 현실을 웃음으로 소화해 내는 것에는 극기와 같은 노력과 통찰력이 필요하다. 작가에게도 2014년 4월의 기억이 큰 충격이었을 것 같은데 고뇌의 늪에만 빠져 있지 않고 이를 극기해낸다. 가볍게 웃어넘기듯 말이다. 내게도 필요한 미덕이다. 미리 걱정하고 미리 고민하는 고질병을 고치는 치료약이다.


2018/02/13 21:24

<이동진 독서법> 이동진 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라는 부제는 저자의 독서에 관한 생각을 함축한다. 실제 그렇게 독서를 해왔던 저자의 이력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신을 실패한 독서가라고 하는데 책을 많이 읽었던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저자는 1만 7천권의 장서를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책 만 권을 권당 만 원으로 계산해도 1억원이다. 1억 7천만원어치의 책을 사서 읽은 셈이다. 영화평론가이기도 한 저자가 값진 부자로 여겨지는 대목이다.

덕분에 '빨간 책방'이라는 팟캐스트도 알게 되었다. 팟캐스트를 들어본 적이 거의 없어서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글로쓰는 서평의 대안적 형식이 될 수도 있겠다. 책을 읽고 책에 대해 뭔가를 쓴다는 것이 사실 부담스러운 일이긴 하다. 책을 읽고 함께 토론을 하거나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이런 일이 여의치 않으니 혼자서 읽은 책에 대해 녹음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저자는 사실 글쓰기보다 말하기가 더 편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나의 경우는 사실 두가지 모두가 퇴보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이 전해주는 최대의 장점은 책을 읽는 부담을 최대한 덜어준다는 것이다. 저자는 책을 완독할 필요도 없고, 목차만 읽어도 되고 심지어 어려우면 다른 책 읽으면 된다고 한다. 나도 책을 읽다보니 점차 책에 대해 편안한 접근법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 책도 그렇게 얘기해준다. 또 말미에 저자가 엄선한 500권의 책 목록이 있다. 1만 7천권의 책을 섭렵하고 제시한 목록이니 몽땅 다 읽어보고 싶다.








2018/02/13 20:16

<야성의 부름> 잭 런던 도서관에서



<벙어리 삼룡이>나 <백치 아다다> 생각이 난다.

거부와는 결이 다른,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해되지 못하는 안타까움.

2018/01/30 19:30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도서관에서


길을 가다가 버스 광고판에 120살까지 살기로 했다는 광고 문구가 언뜻 보였다. 나도 모르게 '미쳤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120살을 호령하며 누굴 괴롭히려고? 순간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어느 누군가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120살을 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바로 이런 문제를 생각하게 해준다. 아무리 건강하게 노년을 보내더라도 언젠가는 스스로를 돌볼 수 없다는 것이 필연적이다. 병까지 있다면 스스로 돌볼 수 없는 시기가 많이 앞당겨 질 것이다. 그런 이유로 독립적인 생활주거 공간과 병원을 양끝으로 해서 그 중간에 위치한 다양한 형태의 죽음직전의 공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실버타운과 같은 노인 주거시설 말이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의사가 죽음을 다루고 죽기 전의 대안적인 삶의 형식에 대해 조사를 하는 것이 이질적인 것 같지만 죽기 전의 가치 있는 삶을 살다가 마무리하는 것을 고민한다는 점에서 의사의 본분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생명이나 삶에 대한 관심이니까 말이다. 이 글의 필자인 아툴 가완디는 의사로서 다양한 방식으로 죽음을 대면하는 환자들을 지켜보았고 척수종양에 걸린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본 가족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의사로서 환자 가족으로서 그의 믿음이 뚜렷하게 전달된다. 환자들은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는 것, 인간다운 마무리를 하고 싶어한다는 것 말이다. 각자가 스스로 드러내고 자각해야 할 과제인 것은 분명하다.

"질병과 노화의 공포는 단지 우리가 감내해야 하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만은 아니다. 그것은 고립과 소외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는 그다지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돈을 더 바라지도, 권력을 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가능한 한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 대해 직접 선택을 하고, 자신의 우선순위에 따라 다른 사람이나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쇠약해지고 의존적이 되면 그러한 자율성을 갖는 것이 불가능해진다고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내가 루 할아버지, 루스 할머니, 앤 할머니, 리타 할머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것은 그것이 분명 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역설적이지만 '내려놓기'를 전제로 할 때 가능하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필자가 '수백만 번 반복되는 현대의 비극'이라고 지칭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아무리 다짐하고 다짐해도 나는 '끝'을 받아들일 수 있을것인가? 숨어버리듯 떠나고 싶은데도 막상 죽음이 온다면 그럴 수 있을지 나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데 쉬운 일이겠나 싶다.

"그래서 날 포기하겠다는 거냐?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지."
인공호흡기에 매달린 채 임종했던 아내의 죽음을 보며 자신은 저렇게 죽지 않겠다고 말했던 라자로프라는 말기암 환자의 고집이다. 그 환자가 특이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족들 역시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보고 싶다. 희망을 저버리는 것은 생명을 저버리는 잔혹한 행위같다.

언젠가 반드시 맞게 되는 것이 죽음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직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은 미래일 뿐이다. 단 한 번 경험함과 동시에 생명은 끝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되돌아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다만 타인의 죽음을 바라보며 자신의 미래를 비추어 볼 뿐이다. 어쨌거나 이 책을 통해서 언젠가 내가 마주하게될 죽음을 현실적인 문제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죽으려면 정말 잘 죽고 싶다.



2018/01/29 23:47

<스토리 텔링, 어떻게 할 것인가> 최시한 도서관에서


- 스토리텔러는 서술로써 스토리를 낯설게 한다: 스토리텔러는 어떻게 하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를 지을까에 관심을 두기보다, 어떻게 해야 자기 나름의 서술을 해낼까에 관심을 쏟는 편이 낫다.

- 스토리텔러는... 창의적으로 서술하기만 하면 기존의 스토리를 활용하여 새 작품을 지어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대에 맞는 형태와 기법으로..)

- 스토리텔러는 감상자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활동을 줄곧 염두에 두면서 작업할 필요가 있다. (...) 감상자로 하여금 '무엇'을 체험시킬 것인가, '어떻게' 체험시킬 것인가, 이 두 가지에 항상 치열하고 섬세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 소박한 감상자들은 허구적인 이야기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 경험적 현실과 허구적 현실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2018/01/24 16:29

<고리오 영감> 오노레 드 발자크 도서관에서


어쩌다 보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를 읽고 쓰는 것이 되어 버린 듯하다. 이 책도 민음사 시리즈의 열여덟째 것이다.
어릴 적 문학전집을 갖고 싶었던 기억이 난다. 왜 추천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교양도서로 추천되었던 책들을 문학전집으로 갖고 싶었다. 그때 열심히 눈 맞춤을 했던 책들의 목록이 대부분 19세기의 소설들이었던 것 같다. 나나, 목로주점, 마담 보바리와 같은 제목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문학전집 시리즈를 읽게 되는 것이 어릴 적 이루지 못한 욕구에 뒤늦게 이끌리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 지금 읽고 있기 때문에 시대가 흐른 뒤의 통찰력으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세기의 소설을 읽다보면 그 어느때보다도 21세기가 문자 자체보다는 시청각적 효과를 가미한 언어 텍스트의 거대한 흡입력과 영향력 속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근대 소설이 자리잡은 것은 자본주의 태동기부터 고려해도 300년인데 비해 1926년 최초의 유성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 지금으로부터 1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동영상, 영화와 같은 시청각 텍스트는 전통적인 그림이나 음악과 달리 음성언어나 자막 등의 역할이 여전히 크다. 같은 언어인데 문자만으로 이루어진 텍스트와 역사는 짧지만 각종 음향과 영상이 화려하게 이끌어가는 텍스트의 흡입력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정도이다. 게다가 최근 몇 년 동안 유투브 같은 많은 창구들이 열리면서 유비쿼터스의 강력함까지 지니게 된 시청각 텍스트들은 더욱 우세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인구의 감소는 필연일 수도 있고 책을 읽는 다는 것은 그만큼 더 노력이 필요한 일이 된 듯하다. 그러므로 19세기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당시의 문체를 그대로 따라 내려가며 천천히 머릿속에서 상상의 세계를 만들고 영화를 찍는 느림과 사유의 과정이다. 다른 누군가는 그럴 바에야 영화 한 편으로 때우지 뭐, 라는 항변을 할 수도 있겠다.

텍스트만으로 돌아와 보면, 옛날에도 그랬겠지만 쉽게 읽히는 글이 더 잘 팔리고 더 잘 읽히는 것 같다. 더 접하기 쉬운 매체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0세기 중반의 소설들만 하더라도 읽기가 쉽지가 않았다. 19세기의 문체를 따라 읽어 내려가는 것은 낯설고 힘들다. 물론 읽고 나서 그려지는 온갖 상상의 날개와 감동은 더 큼에도 불구하고(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처럼) 말이다. <고리오 영감>은 전형적인 19세기 소설의 속성을 그대로 지녔다.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심리, 현재의 등장인물이 있기까지의 배경와 다른 것들과의 관계 등 파악해야할 것들이 한 둘이 아니며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작가가 하나를 말하기 위해 해야할 이야기기 참 많구나 하는 느낌이다. 그런데 그 장광설이 퍼즐 조각처럼 전체 속에 꼭 필요한 느낌이랄까.

발자크는 소설을 통해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든 것을 담으려고 한 작가라고 한다. <고리오 영감>의 이야기는 수수께끼 같은 제면업자의 뒤를 캐듯 살펴들어가 딸들을 위해 모든 것은 헌신한 뒤 병들어 죽어간 아비의 부성애를 펼쳐놓는다. 그 주변에 당시 사교계, 귀족들을 통해 사회적 성공과 욕망, 음모 등이 짜여져 있다. 고리오 영감에 대한 연민이 읽혀지지만 맹목적인 사랑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문제제기 하는 것 같지는 않다. 현대 소설이었다면 이런 문제적 인간에 초점을 맞추었을는지 모른다. 철 없는 딸들은 이기적이고, 늙은 애비는 고통 속에 죽어가는 현실만이 그려질 뿐이다. 

19세기의 사회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소설들은 늘 귀부인들에겐 정부가 있고 정부는 귀부인을 위해 헌신하거나 배신하거나 하는 이상한 공통점이 있다. 사회적 지위와 명예가 맞닿아 있는, 당시로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관습이었겠지만 현대적 시각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다. 요새는 불륜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부르주아 도덕이 기본이 된 사회이고 나 역시 그 가치관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19세기의 소설을 읽는 것은 시간이 많이 있을 때나 좋은 듯해서 평소엔 부담스럽긴한데, 일단 읽으면 시공을 넘나드는 듯한 재미가 있다. 당시의 사회를 지금과 비교해 보는 것도 상당한 재미 중의 하나이다. 덤으로...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19세기의 소설들은 영화로 보는 것이 가장 편리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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